오답투성이의 삶이지만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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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식 돼지불백
[49글] 며칠 전 신사역 부근에서 일을 하는 형님을 가로수길에서 만나기로 했다. 애플스토어 가로수길에서 볼일이 있어 나가는 김에 점심쯤 식사 약속을 함께 잡았다. 볼일을 마친 후 형님이 가보고 싶다는 식당이 있다 해서 그곳으로 향했다. 오늘의 메뉴는 '제육볶음'. 제육볶음, 김치찌개, 된장찌개... 회사 근처에는 이런 백반류를 파는 식당이 없다. 예전 회사 근처에는 괜찮은 백반집이 있어 하루 걸러 한번씩 제육볶음으로 점심을 해결했는데, 간만의 제육볶음이라니 반갑다. 고기가 제주도에서 온 건지 확인은 할 수 없지만 간판이 '제주식 돼지불백'이다. 이곳 식사류는 딱 제육볶음만 있다. 보통 단일 메뉴로 음식을 내는 식당은 컨셉이거나 이 음식에 자부심이 있는 경우인데, 이 집은 확실히 후자다. 철판에 어느 정..
2024. 11. 17. -
야근
[48글]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회의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저녁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팀원들과 서둘러 회사를 뛰쳐나왔다. 퇴근이면 좋겠지만... 불금이지만... 태산처럼 쌓인 할 일을 두고 퇴근할 수가 없는 처지. 그래도 괜찮다. 오늘의 야근 식사는 삼겹살이니까. 먹기라도 잘 먹어야지. 밖을 나오니 하늘을 보니 보름달이 떠 있다. 하... 달이 휘엉청 떠있는데도 퇴근을 못하는구나. 씁쓸한 현실이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니 누굴 탓하랴. 그래도 밤 깊은 야근은 이제 한 달 정도만 바짝 하면 되니 그에 위안을 삼는다. 겨울 초입인데 완연한 봄 날씨다. 걸쳐 입고 나온 후드티를 벗어 들고, 우리를 따라오는 보름달을 가끔씩 올려다보며 회사에서 좀 떨어진 삼겹살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
2024. 11. 16. -
제안 시즌
[47글] 바야흐로 제안 시즌이 다가왔다. 해마다 11월이 되면 광고대행사는 내년 한 해 먹고 살 농사를 시작하는데, 11월과 12월은 오롯이 제안을 준비하고 발표하는데 시간을 써야 한다. 보통 12월까지 계약이 된 광고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실무는 실무대로, 시간을 쪼개 제안까지 투입되어야 하는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예상대로 11월이 되자 제안요청서(a.k.a. RFP)가 쏟아진다. 올해에 이어 계약을 연장하는 '방어 PT'는 물론, 우리 회사와 잘 어울리고, 좋은 레퍼런스가 되며, 수익성까지 괜찮은 '신규 광고주 영입'을 위한 과업을 고른다. 본부에서 진행하기로 한 6개의 제안 건 중, 우리 팀에서는 2개의 제안에 참여하기로 했다. 지난해 처음 수주한 프로젝트의 방어 PT 건과 지난 해 다른 ..
2024. 11. 15. -
군고구마가 제철
[46글] 겨울이 되면 빼놓지 않고 찾는 게 있다. 군고구마. 원래 고구마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군고구마 맛집을 우연찮게 찾은 후로 매년 같은 곳에서 사다 먹는다. 사뭇 추워진 걸 보니 이제 제철이 왔구나 싶다. 논현동 모처의 카페에서 겨울이 되면 군고구마 기계가 돌아간다. 예전 회사가 이 근처라 알게 된 곳인데, 커피를 주문하니 서비스로 주신 군고구마에 매료(?)되어 그 뒤로는 겨울 내 서너 번은 일부러 찾아가 사 먹는 곳이 되었다. 카페 사장님은 마케팅 천재인 게 분명하다. 올해 2월쯤 군고구마 생각에 주문하려고 연락을 하니 '이제 군고구마 끝났어요, 겨울에 다시 합니다'라고 해서 아쉬웠는데, 지난주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궁금해 전화를 하니 막 개시했다고. 그래서 오늘은 구황작물을 애정하는 팀..
2024. 11. 14. -
맵찔이
[45글] 어제는 야근식대로 씹을 거리를 사려고 편의점에 들렀다. 평소에 잘 사지 않는 과자를 몇 개 주워 담아 계산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과자 봉지에 고추가 그려져 있다. 심지어 태국산이다. '아, 이건 내가 못 먹는 거구나, 와이프 가져다줘야지~'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다. 식당에서 주문할 때, '얼마나 매워요?'라고 물으면 보통 '신라면 정도예요, 신라면 보다 조금 매워요' 정도로 답하는 걸 보니 이게 기준인 듯하다. 나는 딱 신라면 정도가 딱 한계다. 먹을 때 고통스럽고 힘들다. 아,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배탈 후폭풍이 2~3일을 가다 보니 매운 음식은 가급적 피한다. 예전에 집에 놀러 온 처제와 간장 반, 고추장 반 찜닭을 시켜 먹는데, 내가 매운 쪽에 손을 안대니 처제가 '..
2024. 11. 13. -
선택하지 않은 길
[44글] 살다 보면 과거에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길의 끝에는 무엇이 펼쳐졌을까 하는 궁금할 때가 있다. '수많은 선택들의 모음집'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나름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 말이다. 그런 궁금증은 아마도 전 인류적, 세대적인 공통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영화나 소설에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다루는 '평행이론'이란 소재는 이제 진부한 클리셰가 되고 있다. 오래전 방송 프로그램 속 A와 B 선택지에서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는 모습은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이라면 기억하는 장면일 듯 하다. 가지 않은 길의 끝에 놓은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얼마 전 애플TV에서 '30일의 밤'을 시청한 후, 도서관에서 원작 소설..
2024. 11. 12. -
살면서 주운 말
[43글] 간혹 우연찮게 가슴을 울리는 말이나 문장을 보게 될 때가 있다. 시쳇말로 '뼈 때리는 글'은 오래도록 강렬하게 남아 내 생각, 행동, 신념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오늘 출근을 하니 책상 위에 빼빼로가 한통 놓여있다. 팀원 중 하나가 두고 간 듯한데, 달력을 보니 다음 주 월요일이 빼빼로데이다.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지만 오늘은 특별히 따뜻한 커피와 빼빼로를 함께 먹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오늘 아침도 든든하게 시작한다. 빈 박스를 버리려다 보니 박스에 '어떻게 맨날 잘해요'라고 쓰여있다. '힘내', '파이팅', '넌 할 수 있어' 등의 더 많은 요구를 함의한 뻔한 응원의 메시지가 아니다. 그저 한 문장의 메시지일 뿐인데, 따뜻한 위로가 담겨 있다. '그럴 수도 있지', '너 할 만..
2024. 11. 11. -
늦은 경험이 주는 것
[42글] 살면서 참 많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한번쯤 해봤음직한 것도 좀처럼 기회가 되지 않아서 처음 겪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음식의 경우 갑자기 유행을 타는 두바이 초콜릿 같은 생소한 음식이 아닌 이상 누구나 먹어봤음직한 것도 '내가 왜 이걸 처음 먹어보는 거지?' 하는 의외의 경험들이 그렇다. '대한민국 이 좁은 땅덩어리에 여기를 처음 가본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는 유명한 지역이라 일부러 찾아가기도 할 만 한데 말이다. 강원도 속초, 강릉은 숫하게 다니면서 그 아래 주문진은 재작년에 처음 가봤고, 작년에 방문한 여수도 그랬다. 아, 놀랍게도 동대문 DDP도 작년에 처음 가봤다. 지난주에 마포에서 광고주 미팅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노량진 수산시장에 갔다. 노량진 수산시장을 처음 와..
2024. 11. 10. -
모처럼 회식
[41글] 지금 회사에서 담당하는 큰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월 2~3회씩 오프라인 행사를 꼬박꼬박 진행한다. 그만큼 바쁘기도 하고, 내가 담당하고 있는 두 팀에서 여러 개의 프로젝트 소화하다 보니 다 함께 식사할 시간도 좀처럼 나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2개월을 준비한 오프라인 행사가 압구정에서 무사히 끝났다. 일이 마무리될 때쯤, 팀장에게 저녁식사는 어떻게 할까 물었더니 이미 잘한다는 양꼬치 집으로 정했단다. 그러더니 "국장님, 지금 하실 거 없으시니 저희 마무리할 동안 가서 자리 좀 잡아주세요!"란다. 역시 우리 강팀장은 계획이 다 있구나... 이런 식으로 요즘 우리 팀은 저녁식사 겸 회식을 해결하고 있다. 흔쾌히(?) 먼저 일어나 막내 직원과 함께 양꼬치 집으로 향했다. 다들 아다시피 요즘은 회..
2024. 11. 9. -
진심 어린 사과
[40글] 기대가 컸나 보다. 사람들 앞에 서자마자 그는 냅다 사과부터 했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와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는 그를 보면서, 저치는 자기 잘못이 뭔지도, 자기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지도 전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기대가 컸던 탓인지 약이 올랐다. 그냥 등 떠밀려서, 요즘 말들이 많으니 그래도 내가 나서야지 했던 걸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금 곱씹게 하는 순간이다. 지금은 밈이 되어버린 어느 남녀의 대화,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다 미안해, 오빠는 그게 문제야'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듣기만 해도 어질어질한 현문우답의 현실. 아이들도 친구에게 사과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엄빠에게 묻고 상의하고, 시의적절한 타이밍을 골..
2024. 11. 8. -
생일 선물 (feat. 아이패드)
[39글] 10월에는 딸아이가 고대하는 특별한 날이 있는데, 바로 자기 생일이다. 10월에 접어드니 일찍부터 '생일파티를 할까? 누구를 부를까?' 등등의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생일 즈음이 되어서 딸아이에게 작년에 친구들 모아서 생일파티를 했으니 올해는 가족끼리 보내는 게 어떠냐 물었더니 흔쾌히 좋다 했다. 아내와 아이 생일을 어떻게 해주는 게 좋을지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이제 곧 중학교에 올라가니 새 아이패드를 사주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고등학생 아들을 키우는 친한 형님에게 연락해서 '이제 중학생이 되는 아이에게 아이패드 선물이란?'하고 물었더니 중학교 때는 몰라도 고등학교 가면 다 하나씩 써야 한단다. 그래서 새 아이패드를 장만해 주기로 결정하고 나니, 이제 ..
2024. 11. 7. -
가을볕
[38글] 지난 주말 아침, 딸내미를 데리고 차를 고치고 왔다. 햇살을 받고 달리니 조금 더운 느낌, 차창을 여니 시원한 바람이 제법 불었다. 선루프까지 활짝 열고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그리고 오늘, 고작 3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아침 온도는 체 5도를 넘지 않는다. 옷장을 뒤적여 얇은 패딩을 꺼내 입고 출근을 했다. 사무실에서는 ‘내일은 영하 2도래! 날씨가 미쳤어'라며 직원들이 호들갑이다. 올해 가을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끝자락인가. 마치 조기종영되는 드라마 같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회사 주변을 산책했는데, 오후에 접어드는 시간이라 그런지 그리 춥지도 않고 가을볕도 좋다. 볕도 좋고 상쾌하니 '이대로 그냥 퇴근해 버릴까?' 싶었다. 오늘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촤라락 떠오르자..
2024. 11. 6. -
글쓰기 롤모델
[37글] 주말에 도서관에 갔다가 예전에 한번 빌렸던 책을 다시 빌려왔다. 작가 쓰무라 기쿠코의 '설레는 일, 그런 거 없습니다'라는 소설인데, 몇 개월 전에 첫 몇 페이지를 읽고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로 반납을 했기 때문이다. 다시 빌린 것은 소설 속 등장인물의 소소한 아침을 꼼꼼하게 표현해 놓은 부분을 다시 읽고 싶어서다. 그때도 '아, 이런 글을 써야 하는데'라며 아내에게 몇 구절을 읽어줬던 기억이 난다. 살면서 롤모델 같은 건 없었다. 특히 거창한 '인생의 롤모델' 같은 건 더더욱. 자존감이 높아서 남의 인생보다 내 인생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뭐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딱히 닮고 싶은 인물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작가의 글을 보면서 처음 무언가를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
2024. 11. 6. -
살기 좋은 곳
[36글] 개인마다 '살기 좋은 곳'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 집값을 결정하는 '역세권', '슬세권'을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먹거리나 놀거리가 있는 곳, 혹은 세상 조용한 '숲세권'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경우는 '아이를 키우기 좋은 곳인가'가 기준이 된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을 때, 있는 거라곤 이마트와 코스트코 밖에 없었다. 주변은 여기저기 아파트가 들어서느라 공사가 한창이었고 상권도 좋지가 않아서 외식이라도 하려면 차를 타고 멀리까지 나가야 했다. 그리고 몇 년 새 아파트들이 완공될 때쯤, 가까운 곳에 고속도로 IC가 생기고, 도서관, 주민센터와 보건소도 생겼다. 작년에는 주민센터 옆에 파출소도 들어섰다. 멀지 않은 곳에 대학병원도 2개나 있고. ..
2024. 11. 5. -
걷고 타고 출근길
[35글] 평소 자차로 출퇴근을 한다. 서울 강북에서 신혼집을 차린 후 주머니 사정에 조금씩 위로위로 올라가다 보니 의정부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의정부 택지지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구리-포천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집앞에 IC가 생긴 후로는 쭉 자차로 출퇴근하는 중이다. 간혹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철야 후 택시를 타고 퇴근하게 되거나 외부 일정 때문에 차를 회사에 두고 퇴근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버스와 지하철로 출근한다. 그런데, 어제는 특별한 이유 없이 빨리 퇴근하고 싶어 조금 이르게 회사를 빠져나와 지하철을 탔다. 퇴근 시간의 도로는 기약 없이 막히다 보니, 칼퇴근을 하려면 대중교통을 타는 게 좋다. 집에서 회사까지 출근길은 자차로 1시간, 대중교통으로 1시간 30분이 걸린다. 오늘은 ..
2024. 11. 5. -
개명(改名)의 추억
[34글] 얼마 전 첫째의 이름을 개명했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물론 고민의 기간이 있었지만 빠르게 결정하고 진행을 할 수 있었던 건 내 이름을 개명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이 어렵지, 역시 두 번 째는 쉽다. 내 예전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지만 특별한 사연이나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놀림을 많이 받는 이름이었다. 바꾼 지 어느덧 5년이 흘렀으니... 이번 글은 내 개명에 대한 회고록 정도가 되겠다. 초등학교 시절, 정확히 2학년 담임 선생님의 '놀림' 덕에 내 이름이 놀림거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께서 동네 복덕방에서 대충(?) 지어오셨다는 그 이름으로 한평생을 살기에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버거운 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흔한 이름은 아녔기에 다른 사람에게 ..
2024.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