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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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가을
[6글] 올해 여름은 너무나 길었다. 계절이 지나는 것을 체감하는 모먼트가 있는데, 추석 때마다 장인어른 댁이 있는 서산에 가면 주변 논에서 가을걷이가 슬슬 시작되는 게 한눈에 보인다. 저녁때가 되면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기 딱 좋은 날씨다'라며 삼겹살을 사러 나기도 한다. 나름 가을임을 느끼는 순간이다. 비로소 가을이 왔구나, 금방 또 추워지겠다... 는 말이 자연스레 나오는데, 달력의 날짜만 가을이지 이번 추석은 정말이지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역대급 날씨였다. 여름이 길었다기보다 가을이 여름 탈을 뒤집어 쓴 느낌에 가깝다. 추석이 끝난 주말에 이틀 비가 오더니 가을이 제정신을 차렸는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갑자기 추워졌다. 덕분에 온 가족이 환절기 감기에 걸렸지만 제대로 된 가을이 온 것..
2024. 9. 28. -
광고회사의 지옥
[5글] 어제 광고주에게 갑작스레 연락이 왔다. 그동안 준비하던 제안 리뷰를 하자고. 도무지 몇 차 제안까지 보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그 제안의 리뷰를 또 하자는 것이다. '내일 아침 10시 30분 괜찮으실까요?'라는 물음에 아... 오늘은 집에 못 가겠구나 싶었다. 다행히 그동안 준비한 게 있어서 팀원들과 새벽 2시 언저리에는 정리하고 집에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이번 제안 리뷰가 마지막이 될 것이냐는 답답함이었다. 당초 제안의 시작은 5월이었다. 광고주 브리핑으로 시작해 제안서를 만들고, 리뷰하고, 수정하고, 또 다시 리뷰하고...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예산을 요청하고. 그렇게 9월 막바지가 되었다. 광고회사에서 경험하는 지옥은 이런 것이다. 다른 걸 할 수 없게 묶어두..
2024. 9. 27. -
새 운동화
[4글] 올해 유난히 길었던 늦더위가 가실 즈음부터 매일 저녁 산책을 나가기 시작했다. 며칠 전, 딱딱한 운동화를 신고 빠르게 걷다가 발등에 통증이 온 뒤로 걷기 용도의 운동화를 하나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요즘 러닝에 푹 빠져 있는 회사 후배가 이런저런 러닝화를 추천해 줘서 백화점에 갔더니 사이즈 품절이란다. 추천받은 신발은 예뻤지만 '3~21km를 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러닝화'이라고 적혀 있어약간 부담스럽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대신 편하게 걷는 용도의 워킹화를 샀다. 사이즈가 없어 택배로 주문한 새 신발이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점심 때쯤 왔다. '오늘은 일찍 가서 좀 걸어야겠다' 마음 먹던 찰나, 광고주가 내일 아침 보고가 갑자기 잡혔으니 제안서를 수정해서 가져오라는 연락이 왔다. 일을 마치..
2024. 9. 26. -
하루 글쓰기
[3글] '글쓰기'는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스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블로그에 글을 썼었고 그 덕에 지금까지도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다. 정작 취미가 일이 되면서 나의 글쓰기에 손을 놓고 있었는데,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개점휴업(?) 상태의 블로그 하나를 뚝딱 고쳐서 '매일 글쓰기' 용도의 작심용 블로그로 개조해 오픈했다. 두 아이에게도 글쓰기를 습관처럼 만들어주고 싶어 어떻게 글을 쓰게 할까 고심하다가 1년 전부터 '아빠에게 이메일 쓰기'를 매일 과제로 주었다. 그래서 오후 8시가 되면 어김없이 두 아이로부터 이메일이 도착한다. 첫째는 그 덕인지 오늘 있었던 에피소드 중 하나를 선택해 기승전결을 갖춰 제법 잘 써온다. 둘째는 성격상 오늘 하루의 일상이나 관심사를 요약 정리해 보내오는데 ..
2024. 9. 25. -
혼자서도 잘먹해요
[2글] 중견 광고회사에 입사한 지 꼭 1년이 되어간다. 부서장이지만 완전한 실무형 부서장(?)이라 내 나이쯤 돼서 열심히들 다니는 골프연습장은 고사하고 매일 광고주 상대하느라 시간이 없다. 점심은 건너뛰기 일쑤, 야근 밥까지 꼬박 챙겨 먹어야 오늘 할 일이 얼추 마무리가 된다. 그렇게 꼭 1년이 되어간다. 이곳에서 배운 스킬이 하나 있다. '혼자 밥 먹기'. 내 커리어를 반추해 보면 안 먹으면 안 먹었지 혼자 밥을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제는 저녁때가 되면 '어디 보자 오늘은 뭘 먹을까나' 읊조린다. 각자도생 MZ의 천국에서 같이 밥을 먹자는 제안이나 식사는 하셨냐는 질문 따위도 들어본 지 오래다. 그렇다고 그다지 서운하지도 않다. 오늘은 사무실 근처 곰탕집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이제..
2024. 9. 24. -
삼춘기 어디쯤
[1글] 둘째 녀석의 짜증 섞인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오전 7시 50분 즈음. 이제 10살 밖에 되지 않은 녀석이지만 워낙에 자기 시간관리에 철저한 터라 아침에 일어나서 해야 할 계획을 세워두었는데, 7시에 맞춰둔 알람소리를 미쳐 못 듣고 8시가 다 되어 깼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째는 짜증반, 울음반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중이다. 서둘러 침대를 정리하고, 옷까지 챙겨 입고 수학 문제를 푼다. 대견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일 때는 그냥 먹고 쌀 줄만 알았던 것 같은데... 애 엄마가 좋은 아침 루틴을 만들어 준 덕분이다. 그래서 우리 집 아침은 각자 방에서 뭔가에 몰두하는 첫째와 둘째 덕에 고요하다. 요즘 둘째는 조금만 계획에 어긋나도 짜증을 부리기 일수다. 삼춘기 어디쯤인 것 같다. 오..
2024. 9. 23.